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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9 독도에 대한 한일쟁점 비교

출처:해양경찰청

  쟁점별 한일 양국입장 비교(국회 법제예산실)
 

 지난 1996년 2월, 당시 일본측이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 내에 독도를 포함 할 것이라는 것이 국내에 알려지자 독도영유권분쟁이 다시 첨예하게 불거졌다. 이를계기로 1996년 6월국회사무처 법제예산실에서는 독도문제에 관한 예산정책 참고자료를 작성하였다. 아래의 글은 법제예산실이 작성한 ′한일양국 입장비교′라는 글의 전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등 역사적 문헌 
 
 

한국 입장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于山(독도)과 무릉(울릉)의 二島가 縣(울진현)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다. 이도(二島)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육안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고, 일본의 오끼島로부터는 육안 관측이 불가능함.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531년)도 우산도(독도)와 울릉도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영토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同) 부속지도에서도 울릉도와 우산도를 동해 가운데에 표기하고 있음. 다만, 우산도의 위치가 조금 틀리는데 이것은 지도제작상의 미숙으로 지적 될 수 있으나 영유권문제에 있어 우산도(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증명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는 것임.


  일본 입장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于山島가 죽도(독도)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한 설(說)로는 우산, 울릉, 본일도(本一島)′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지도는 우산도를 한반도와 울릉도 사이에 그리고 있어 위치관계가 죽도(독도)와 부합 되지 않음.

조선고문헌 중의 우산도는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于山國)이 신라(新羅)에 귀속되었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의 기록을 함께 생각해 보면, 전래되어 오는 과정에서 혼란이 생겨 울릉도를 울릉도와 다른 우산도(于山島)가 존재하는 것처럼 기술한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음.


 
  독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문헌<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년)   
 
 

한국 입장

隱州視聽合記(1667년)는 송도(독도)와 울릉도가 고려(조선)에 속한 것이 고은기(隱岐)(오끼島)가 日本의 한계(限界)라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 입장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는 독도는 송도(松島)라는 명칭으로, 울릉도는 죽도(竹島)라는 명칭으로 기술되어 있음.


 
  17C말 안용복(安龍福)사건과 울릉도.독도의 조선영토 재확인   
 

  한국 입장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은 1693년 봄 울릉도에서 대곡가(大谷家)의 어부들에 의해 日本의 은기도(隱岐島)로 납치되어 가서 은기도주(隱岐島主)에게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주장했고, 1696년 봄 다시 울릉도와 독도에 건너가 일본어부들이 조선영토인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침범한 것을 꾸짖고, 일본으로 건너가 隱岐島主, 백기주(伯耆州)태수에게 일본어부들의 울릉도 및 독도의 침범을 항의했음.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문제가 조선왕조와 덕천막부의 외교현안으로 되었으나 1699년 양국이 외교문서의 교환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재확인하였음.

위 외교문서에 지금의 독도명 칭은 나오지 않으나 이 섬을 울릉도에 속해 있는 섬으로 보고 있는 이상 그 영유권도 동일하게 처리된 것임. 왜냐하면 17C 일본인이 독도에서 행한 어업이란 울릉도 진출의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 그 증거로 덕천막부의 울릉도 도항금지후 대곡(大谷) 및 (촌천)村川의 양가(兩家)가 독도만을 목적으로 도항한 일은 없었음.

17C말 안용복사건후 덕천막부시대의 일본 문헌들은 한 건(件)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많은 관찬 및 준관찬 고지도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표기하고 있음. 특히 하야시가 1785년에 제작한 3국접양도에는 조선국을 황색으로 일본국을 녹색으로 채색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황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영토임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문자로 표기까지 하고 있음.


  일본 입장

울릉도는 신라에 귀속된 이후 조선령이었으나 오랫동안 무인도로 되어 있었고, 덕천막부는 울릉도가 조선령이라는 인식이 없는 채, 1618년 大谷, 村川 兩家에 대하여 도해면허(渡海許可,독점적 개발권)를 부여했음. 송도(독도)에 대해서는 울릉도의 경우와 같은 도해허가의 공문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대곡가(大谷家)의 기록에 의하면 독도에 대해서도 관의 허가를 얻어 독점적 개발을 하였음.

大谷, 村川 兩家에 의한 울릉도 개발은 80년간 계속되었으나 1693년의 안용복 납치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 양 정부간에 울릉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교섭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령인 것을 인정하여 1696년 3월 1일자로 죽도(울릉도)에 도해금지 지령이 내려졌으나 송도(독도)가 영유권 교섭의 대상이 된 기록은 없음.

안용복(安龍福)은 1696년 6월 다시 은기(隱岐)에 나타났고, 적기(赤崎)에서 무슨 소송에 연루되었다가 동년 8월 조선으로 돌아갔음. 당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은 안용복을 국외도망죄로 처벌하였는데, 조사를 맡았던 비변사의 기록은 없어져 버렸지만 숙종실록에는 그 개요가 재기록 되어 있음.

1696년 3월 울릉도에 도해금지 지령이 내려진 관계로 안용복이 내방한 동년 6월에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진술은 사실에 반하고 쇄국의 금기를 깨뜨린 것에 대한 변명임.


 
  조선국교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1870년)등 일본명치정부의 공문서   
 
 

한국 입장

명치유신직후 1869년12월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太政官,총리대신부)은 조선사정을 내탐하기 위하여 佐田白芽등을 파견하면서 조사사항속에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始末)′을 넣어 조사하여 오라고 지시했음.

1876년 일본 도근현(島根縣)은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자기 현(縣) 지도(地圖)와 지적조사(地籍調査)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 내무성(內務省)에 질의하였고, 이에 대해 내무성은 "이 문제는 이미 원록12년 (1699년)에 끝난 것으로 죽도와 송도는 조선영토이므로 일본은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본지도와 지적조사 에서 빼기로 결정하였음 또한 내무성은 이를 太政官에게도 질의하였는데, 太政官 역시 ′죽도外 一島(독도)′는 日本과 관계가 없다는 지령문을 1870년 3월20일 결정하였음.


  일본 입장

조선에 출장간 외무성 佐田伯芽등의 보고서인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죽도.송도가 조선부속으로 있게 된 始末′이라고 제목을 붙인 한 항이 있을 뿐, 죽도.송도가 조선부속(령)으로 된 시말(경위)은 적혀 있지 않음. 또한 외무성이 기안하고 太政官의 결재를 받은 ′조선에 파견되어 내탐하는 자가 준수해야 할 사항′에는 그런 조사사항명이 없어 자세한 것은 명료치 않음.

도근현(島根縣) 지적편찬계(地籍編纂係)는 대곡가(大谷家)의 기록 등에 의거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에 편입하는 내용의 ′일본해내(日本海內) 죽도외(竹島外) 일보(一島) 지적편착질의(地籍編纂質疑)′를 내무성앞으로 제출했고, 내무성은 원록년간(元祿年間)의 일본과 조선교섭기록에 의하면 죽도는 일본과 무관하다고 太政官에게 보고했고, 太政官 우대신(右大臣)은 내무성안대로 죽도外 一島는 일본과 무관하다고 지시했음. 요컨대 元祿의 일본.조선교섭에서 松島(독도)가 화제가 된 적이 없으며, 내무성이 大臣에게 보고하면서 첨부한 일본.조선교섭관계문서도 죽도(울릉도)에 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는 송도(독도)도 또한 일본과 무관계하다고 된 것임.


 
  조선왕조의 울릉도. 독도 재개척(再開拓)과 대한제국(大韓帝國) 칙령(勅令) 제41호 (1990년)   
 

  한국 입장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법침입과 삼림벌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대한제국정부가 1900년10월25일 발표한 칙령 제41호 제2조는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했고,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바위섬 죽서도(竹嶼島)를 가리키고, 석도(石島)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임.

당시 울릉도 주민의 다수는 전라도출신 어민들이었고, 전라도 방언으로 ′돌(石)′을 ′독′이라 하였음. 따라서 대한제국정부가 칙령 제41호에서 ′독도 (돌섬)′를 의역하여 ′석도(石島)′로 표기했지만, 당시 울릉도 주민사이에서는 음을 취하여 ′독도(獨島)′로 표기하기도 하여 石島와 獨島가 병용되고 있었음.


  일본 입장

울릉도 해안 가까이에는 오늘날 관음도라 불리는 섬을 비롯해 몇 개의 암초도′돌섬′이 있으므로, 이 칙령의 石島가 그러한 주변 암초도의 총칭 내지 대표격인 관음도가 아니라 죽도이기 위해서는 증명이 필요함. 또 이 칙령에 있는 石島가 죽도(독도)라 할 지라도 法令에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 규정된 한가지 사실만으로 이 섬이 한국의 영유에 속한다고 할 수 없음.



  일제의 독도강제 편입(1905년)   
 
 

한국 입장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도근현(島根縣)에 거주하는 중정(中井,나까이)이라는 어업가(漁業家)가 독도에서 물개등의 어로 독점권을 한국정부로부터 얻기 위하여 일본 농상무성에 이를 교섭해 주도록 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 해군성 수로부장이 中井을 불러 독도는 무주지(無主地)라 단정하고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낼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신청할 것을 종용했음. 일본 해군이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기회에 독도를 침탈하여 해군 감시망루를 설치하려고 했던 것임.

일본정부는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中井의 청원서를 승인하는 형식으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는 각의결정(閣議決定)을 내렸고, 도근현(島根縣)은 1905년 2월 22일 현고시(縣告示) 제40호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했던 것임. 그러나 독도가 고유의 영토였다면 왜 영토편입조치가 필요했는가? 이 조치는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행정관할에 속하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임.

선점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無主의 지역임을 요하나 독도는 무주의 지역이 아니라 신라이래 울릉도와 같이 한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역사자료에 의해 증명되며, 또한 선점의 의사는 대외적으로 표시됨을 요하나 일본정부는 이를 대외적으로 표시한 바 없음.

1905년의 독도편입조치는 일본이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임.


  일본 입장

1904년 도근현(島根縣)에 거주하는 中井이라 기업가가 리양코 섬(독도)을 영토로 편입하여 빌려주길 바란다는 청원(請願)을 했고, 정부는 島根縣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1905년 1월28일 내무대신의 청의(請議)에 의해 죽도의 영토 편입을 각의결정(閣議決定) 했고, 이에 따라 도근현지사(島根縣知事)는 1905년 2월22일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 제40호로 독도를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속(所管)으로 정한다고 고시했음.

죽도편입후 根島縣은 죽도에서의 강치어업을 허가어업으로 지정하여 中井등 4명에게 이를 허가했음. 그리고 매년 사용료가 국고에 납입되었음.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였던 것을 근대 국제법상의 형식에 맞추어 영유의사를 확인하여 공시했기 때문에 각의결정을 거쳐 부현(府縣)이 고시하는 것은 당시의 일본 관행(慣行,明治 31년의 남조도(南鳥島)의 예)에 따라 적법한 편입조치였고, 편입당시도 그 이전에도 죽도는 한국영토였던 적이 없으며, 국제법상 통고는 告示의 요건이 아님.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1906)   
 

  한국 입장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의 독도침탈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05.11.17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日本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6. 3.28 도근현(島根縣) 말단 지방관이 울릉도에 들러 구두로 울릉도군수에게 영토편입사실을 알린 때임.

심흥택 군수가 1906. 3.29 "본군소속(本郡所屬) 독도(獨島)가 日本에 영토 편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강원도 관찰사를 경유하여 내부(內部)에 보고하자, 내부대신(內部大臣)은 ′독도를 일본 속지(屬地)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며, 아연 실색할 일′이라고 경악해 하였으며, 참정대신은 1906. 4.29 지 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인의 領土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음.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침탈사실을 알자마자 즉각 반대하고 항론을 했으나, 외교권을 강탈당하고 일제(日帝) 통감부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단지 항의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하지 못했을 뿐이므로, 오늘날 일본정부가 1905년 당시 왜 항의문서를 발송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임.


  일본 입장

영토편입후의 1906년 3월 신서(神西) 도근현(島根縣) 제3부장이 죽도(독도) 조사 후 울릉도에 들러 심흥택 군수에게 죽도가 日本에 편입되었다고 알리자, 곧 심흥택 군수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였음.

한국정부는 이리하여 죽도의 일본편입사실을 알게 된 것인데, 중요한 것은 심흥택 울릉군수가 이 시점에서 죽도를 자군(自郡)의 소속(所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임. 다만, 한국정부는 도(道)에 다시 조사하도록 지령을 내렸을 뿐 일본정부에 대해 항의를 한 기록은 없음.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IN(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 및 제1033호(1946년)   
 

  한국 입장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 1.29 SCAPIN 제677호제3항에서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는 섬들의 (a)그룹으로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들었음.

연합국최고사령부는 SCAPIN 제677호에 의해 1946. 1.29 독도를 주한 미군정에 이관하였고, 1948. 8.15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자동으로 독도를 포함한모든 영토를 반환 받은 것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 6.22 SCAPIN 제1033호에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을 설정하여 일본인의 선박 및 승무원은 금후 독도와 독도의 12해리 이내 수역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지령하였는데, 이것은 독도가 한국영토이므로 일본의 어부와 선박들은 접근하지 못한다고 선포한 것임.


  일본 입장

1946. 1.19 SCAPIN 제677호는 ′울릉도, 죽도, 제주도′를 일본의 범위에서 제외했음. 다만 이 지령이 행정권(行政權)의 정지였지 영토의 처분이 아님은 총사령부의 권한(權限)에 비추어 명백하며 동(同) 지령중에도 "이 지령중의 조항은 어느 것이나 포츠담선언의 제8항에 있는 작은 섬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 측의 정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했음.

마찬가지로 1946. 6.22 SCAPIN 제1033호에서도 "일본의 선박 및 그 승무원은 죽도와 죽도로부터 12해리 내에 접근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국의 관할권, 국제경계선 또는 어업권에 관한 최종결정에 관한 연합국측의 정책표명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음. 또한 일본어선이 개별 허가를 요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수역(맥아더 라인)은 그후 점차 확대 되었으나 동해의 중앙을 통과하는 선(거기에 죽도가 걸려 있다)에 대해서는 변경이 없었음.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1951년)   
 

  한국 입장

대일평화조약 제2조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에서 독도가 열거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음.

그러나 동 조약 제2조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모든 도서를 열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국의 영토인 도서가 제주도.거문도.울릉도에 한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명백하고, 또한 제2조에 열거된 제주도.거문도.울릉도가 한국의 최외측에 위치한 도서만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제주도 남방 외측에 마라도가 위치하고 있음을 보아 명백함.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한 것을 대일 평화조역이 이와 달리 규정하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규정(예, 독도는 분리되지 아니한다 등)이 있음을 요하나, 동 조약에는 그러한 규정이 없음.


  일본 입장

1951. 7.19 한국의 주미대사는 대일평화조약 개정영미초안 제2조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을 포기한다)에 대한 한국정부의 수정요구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독도 및 파랑도를 포함한…)를 美 국무장관 앞으로 제출했으나, 미국무성은 8.10 "독도에 관해서는 우리들의 정서에 의하면 한국의 일부로써 다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1905년경부터 도근현(島根縣) 은기지청(隱岐支廳) 관할 하에 있고, 이 섬은 예전에 한국에 의해 영토주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여 한국의 수정요구를 거부했음.

한국에서는 대일평화조약에 SCAPIN 제677호에 의한 독도의 분리와 모순되는 규정이 없는 이상 평화조약 체결 당시의 현실이 그대로 확정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위의 조항에 비추어 볼 때 잘못임은 명백하고, 역으로 평화조약상 으로는 독도가 일본이 보유하는 섬으로 확정된 것임.


 
  평화선(이승만라인) 선언과 독도영유권 문제의 발단 (1952년)   
 
 

한국 입장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한일간에 발단하게 된 것은 1952. 1.18 한국정부가 ′인접해양의주권에관한대통령선언(평화선 선언)′에 대해 일본정부가 항의해 옴으로써 비롯되었음.

한국정부가 평화선을 선포한 것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45. 9.28 [보존수역에 관한 선언]과 [대륙붕의 지하 및 해저의 천연자원에 관한 미합중국선언]을 한 이래 모든 연안국은 [보존수역]과 [대륙붕]을 선언할 수 있다는 국제관행을 따른 것이었음.


  일본 입장

일본정부는 1952. 1.28 "이승만라인선언은 공해자유의 원칙에 배치되는 것으로 국제법상 무효이고, 대일평화조약의 해석상 일본영토로 인정되는 죽도(독도)를 평화선 내에 넣는 것은 일본의 영토에 대한 침범이다"라고 항의했음.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문제 (1954년)   
 
 

한국 입장

독도 영유권은 한국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느 국제재판소에서도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받을 필요가 없음. 일본정부는 독도문제를 ICJ에 제소함으로써 독도영유권에 관하여 한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시도하고 있음.

독도분쟁은 일본이 한말의 혼란기를 택하여 당시 식민지 획득방법으로 악용된 선점이론(先占理論)을 가장하여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는 조치를 위한 침략약탈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순수하고 명백한 법률분쟁으로 볼 수는 없음.


  일본 입장

1954. 9.25 일본정부는 독도문제가 국제법의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니 만큼 양국정부가 합의하여 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제의하였음.한국정부가 ICJ에의 제소를 수락치 않는 것은 한국측 주장의 약함을 입증한 것임.


 
  한일협정(1965년)   
 

  한국 입장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의 제문서(諸文書)의 어디에도 독도를 직접 언급한 것은 전혀 없음. 일본은 독도문제를 협정문안에 명기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미리 만들어 놓은 안(案)대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에 합의한다는 문서를 교환할 생각이었던 같음. 그러나 한국측은 독도는 검토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고유 영토이므로 의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일본측의 두 가지 안을 모두 거부했음.

한국국회에서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독도문제는 분쟁문제가 아니어서 교환 공문의 적용대상이 아니다"고 답변했음.


  일본 입장

일본 신문은 한일협정 조인 다음날인 1965년 6월22일 "양국외상의 밀실회담에서 독도문제의 처리방식도 합의를 보았다"고 보도했음. 즉, ′분쟁의 평화적 처리에 관한 교환 공문′의 적용대상에 독도문제가 포함된다는 것이었음.

일본국회에서 시이나(椎名) 외상은 결코 직접 합의했다는 답변은 피한 체"주관적 해석 내지 기대를 말한 것 뿐"이라고 하였음.


 
  1977년의 독도논쟁   
 

  한국 입장

1977. 2. 7 한국정부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이므로 일본정부의 영유권 주장이나 관할권 행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일본측 발언을 일축함.

1977.12.31 영해법에 따라 독도주변을 포함한 영해 12해리를 설정함.


  일본 입장

1977. 2. 5 일본의 12해리 영해와 200해리 어업수역 선포에 즈음하여 후쿠다수상이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라 발언함.

1977. 1. 1부터 12해리 영해법과 200해리 어업수역에관한잠정조치법을 시행했으나 상호주의에 따라 한국해역에는 후자는 적용되지 않았고, 단지 독도 주변에는 고유영토론에 따라 12해리 영해를 설정함.

 


 
  배타적경제수역과 독도(1996년)   
 
 

한국 입장

한국정부는 1996. 2. 9 "독도는 한국고유의 영토이고 한국이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영토이기 때문에 이러한 접안공사는 한국의 정당한 주권행사이고,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음.

한국정부는 1996. 6.11 배타적경제수역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고, 15대 국회가 개원되어 임시국회가 소집되면 이를 심사하게 될 것임.

한국학자들간에는 독도가 배타적경제수역을 가질 수 있는 섬인지에 대해 찬반논쟁이 있음.


  일본 입장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에 따른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의 선포를 앞두고 1996. 2. 9 일본정부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이고 일본의 동의없는 독도접안시설공사는 일본주권에 대한 침해로서 이의 중지를 요구′하여 왔음.

1996. 6월 현재 일본은 국회에서 배타적경제수역법안을 심사중이고, 일본언론은 독도주변수역을 공동관리수역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음.

Posted by 긴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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